얇은 피막 아래에서 세상이 빙빙 돌았다. 눈을 꾹 감았다 뜨면 빛무리가 각막에서 떨어져 쏟아진다. 어릴 때는 빛이었고 크고 나서는 비문증인 그게 그리고는 속삭이는거야. 추락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밑바닥은 머리가 어지럽지 않아서 어떨 때는 낫다고. 충격을 주어야만 낫는거라면 곧바로 나아지고 싶지 않은 게 또 사람 마음이지. 심장박동에 맞춰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푸른 빛이 얼굴로 쏟아진다. 밤마다 머리칼을 쓸어대는 손은 어머니의 것보단 크고 아버지의 것이라기엔 차갑다. 목소리가 묻는다.어지러워. 그렇다면 그럼 내 가슴에 기대. 나는 이제 심장이 뛰질 않거든…….
현기증이 나도 참아. 사람들은 널 좀 더 잘 보고 싶어하거든. 충격만이 너를 고칠 수 있다면 모두가 너를 옥보다 아낄거야. 자, 저기 빨간 불빛이 보이지? 네 눈 속에 번쩍거리는 신호가 보이지?
네 머리가 도는 게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거야. 휘파람 같은 말에 귀 기울이지마. 너라면 내게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테니까.
신호는 정확히 세 번 울릴거야.
S#1. 프롤로그
그에게 꽂히는 눈은 언제나 한낮의 햇볕만큼 따갑다.
입구의 자동문을 넘을 때부터 세상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멀미를 닮은 거북함이 신나게 골통을 흔들어놓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가 지나가는 동선을 따라 소음이 잦아든다. 어색한 눈인사. 그의 뒤통수가 과녁이라도 되는 양 따라붙는 눈동자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옛 동료들을 그는 일부러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원하지도 않은 건물의 냉방 때문에, 혹은 그의 뒤에서 벌어지고 있을 소리 없는 쑤석거림 때문에 뒷목이 끈적하다. 모든걸 뒤로하고 문앞에 선다.
똑똑. 각 잡힌 노크 소리가 두 번.
S#2. 서장실 – 경찰서(낮)
출근한 것도 아닌데 편하게 앉으라고 서장은 말했지만 상석 바로 오른쪽 자리는 언제 앉던간에 편한 법이 없다. 그가 올라온 서류에 싸인을 마칠 때까지 그는 벌이라도 받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본다. 이윽고 옆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든다.
오랜만에 만난 서장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장례식장 이후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 묻는다.
“안색이 영 별로군. 잠은 잘 자고 있나?”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아직도 높은 곳은 힘든가?”
“…죄송합니다.”
“무리하라고 한 말 아니야. 차차 나아지겠지.”
주고받는 대화는 시기마다 내려오는 공문서 매뉴얼만큼 따분하고 의미가 없다. 같잖은 인사치레를 익숙하게 접어 컵받침 대신 컵 밑에 깔았다. 제 부족을 시인하며 그는 수치심을 꾸역꾸역 씹어 삼킨다. 재차 곱씹던 의사의 부연설명이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쉽게 고쳐지는 증상은 아닙니다.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라도 받는다면 모를까…’
“오래오래 일하려면 휴식도 중요하지. 강력계야 매일 매일이 전쟁이니. 김성진만한 놈들이 요즘 한둘이야?”
김성진.
추산동 살인 사건, 이하 김성진 사건. 약 7000만원의 특수 사기에 사칭, 도주 중 살인까지  ̄ 인터넷 뉴스 배너를 몇 번이나 장식한 인기 스타가 그가 발령난 이후 거진 100%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강력 2팀이 맡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3팀, 4팀의 지원까지 받은 상황에서 이 지리멸렬한 도주극에서 이기는 것은 그에게 임무보다는 사명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사명이 목숨 둘을 희생시킬 정도로 중대한 가치가 있었냐면, 글쎄다.
추격 중 범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동료, 몰아간 건물 옥상에서 머리가 먼저 박살나는지 목이 먼저 꺾이는지에 대한 답을 직접 내려준 범인, 똑같이 구멍이 난 옆구리. 사망 둘과 부상 하나.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꽂히던 시선들과 아들을 잃은 모친의 절규……. 좋은 소리만 들을 수 없는 직종임을, 사람 한둘 죽는 게 낯설지 않은 직종임을 감안하더라도 통 무시하기 어려운 울음과 검거 실패라는 결과와, 그리고 창 밖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빌어먹을 현기증. 사건은 종결됐으나 남은 것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첫 패배는 아물어가는 상처보다 오래 아팠고 지워지지 않는 패배의 증거는 끊임없이 덧나 그를 괴롭혔다. 제 의지로 해결이 되지 않는 어지러움이 그를 더도 덜도 말고 딱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종수야, 그냥 당분간 쉬다 와라.’
그리고 사람이라도 죽일 눈으로 사무실의 창문을 노려보는 그에게 정직 같은 휴가를 내려준 것이 바로 눈앞에 앉아있는 선우준혁 서장이었다. 상태를 질문받은 일에도 심문을 받고 있다는 피해망상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들어간다. 차라리 취조였다면 기를 쓰고 멀쩡한 척을 했을 것이다. 병X이 되었다는 걸 누구 좋으라고 말하라고.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 자리는 그의 잘잘못을 묻는 자리도, 그렇다고 슬슬 다시 복귀하라는 말을 꺼낼 자리도 아닌 것 같았다. 청장의 얼굴에 드리운 묘한 계면쩍음이 그 이유였다. 그는 가끔 번거로운 일(주로 야간 근무나 기자들 인터뷰)을 시킬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결국 무례를 무릅쓰고 그가 먼저 입을 연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서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가볍게 코로 숨을 내쉰다. 그래, 오래 붙잡아두기도 뭐하겠지.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그가 고개를 돌린다. 서장도 표정을 바꾸고 그를 바라본다.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자세를 바르게 하자 서장이 입을 연다. 최 형사, 아니. 종수야. 내가 지금부터 어려운 부탁을 좀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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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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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종수의 차 안 - 서점 (낮)
방향 지시등의 알림음이 딸깍대며 차 안을 울린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자 저 앞 버스 정류장에 내리는 낯익은 옆모습이 보인다. 근처 건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갓길에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 던져놓은 망원경과 핸드폰 중 무엇을 집을지 그는 잠시 고민했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문을 열자 달아오른 공기가 숨을 틀어막았다. 아직 8월도 아니면서 날씨가 정도를 모르고 더웠다. 습한 공기를 뚫고 자동문 버튼을 누르면 훅. 서점 종업원의 인사말과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밀려온다. 베스트셀러 코너 너머 저만치 구석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한다. 타겟을 찾은 발소리가 잔잔한 클래식 사이로 녹아든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집중하는 옆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가 남자를 쫓아다닌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하는 일은 여타 잠복근무와 비슷하다. 대상이 외출할 시 그의 동선을 파악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 사건을 맡을 때마다 줄곧 하던 일이다. 잠복근무와 다른 점은 상대가 그가 사건의 용의자도, 목격자도 아닌 바로 그 선우 서장의 외동 아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장은 왜 쉬고 있는 부하에게 다 큰 아들의 감시를 맡겼느냐. 그것은 현재 그가 겪고 있는 특이한 병증 탓이라고 했다. 서장은 피곤하기 그지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시작은 침묵이 몰려들어.”
「말없이 눈을 세 번 깜빡이는 게 신호지. 그러면 그 아이는 모두에게서 멀어져 결국 모르는 사람이 돼. 이름도, 성격도, 말투도.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상상이 가나? 방금까지 멀쩡했던 아들의 자리에 모르는 남자가 앉아있는 거야.」
「용의자 심문은 너도 많이 해봤지. 알다시피 걸음걸이나 호흡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냐. 그 자리에 있는 건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어.」
「정신을 차리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잠시 현기증이 났다고 해. 몽유병도 의심해 봤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또 멀쩡하고. 병원에 검사를 해봐도 모두 정상으로 나오는데 영문을 알 수가 있어야지. 무슨 귀신에 씌인 것도 아니고. 」
「그 애가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건 원하지 않아. 업체 같은 곳은 괜히 맡겼다가 말 새어나가기 딱 좋지. 병명도 모르는데 병원에 가둬 놓을수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입 무겁고 능력 있는 사람이 좀 따라다니며 지켜봐줬으면 좋겠는데…….」
“세 달, 아니, 두 달 만이라도 좋아. 보수는 넉넉히 주지.”
어차피 집에서 할 것도 없잖나. 복귀 아닌 복귀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그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 세상에 상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그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연락을 받은 바로 다음날부터 그는 다시 도로로 출근했다. 그렇게 그의 일상에 남자가 포함되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단단하게 책등을 받치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 너머가 아닌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를 지켜볼 때면, 그는 서장이 보내준 신상명세와 눈앞의 남자를 대조해보곤 했다. 이름, 선우■■. 입양을 오면서 성을 포함해서 이름까지 싹다 개명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흔한가? 그래서 그런지 종이에 적혀있는 네 글자가 영 입에 붙지 않는다. 나이, 28. 키, 192cm… 군대도 다녀온지 한참 된 새끼가 왜 아직도 빡빡이인지 모르겠네. 책 제목은 또 뭐야. 검신전생? 무슨 이상한 책을 읽고 있어. 전부터 지켜봤는데 이 자식 책 고르는 취향이 영 괴랄 맞았다. 한자로 된 제목만 고르는 게…….
그러나 책을 들여다보는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불온의 징조조차 보이지 않는다. 집중하느라 꽉 다물린 입이 문득 시선에 걸렸다. 신상 명세서가 들어있던 봉투에는 사진도 몇 장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서 남자는 카메라를 보며 멀쩡하게 웃고 있었다. 쭉 찢어진 입꼬리가 시원시원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장의 말마따나 한순간에 돌아버리거나, 뭐에 홀린 듯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비정상적인 일들과는 태초부터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 죄도 없는, 평범한 사람을 쫓아다니는 하루. 오래된 서점, 가끔은 도서관, 공원, 근처 체육관… 남자는 할 일도 없는지 이리저리 잘도 돌아다녔고 매번 비슷한 시간에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우뚝 솟은 키와 동글동글한 뒤통수 때문에 어딜 가든 눈에 띄어 감시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규칙적이라면 규칙적인 남자의 생활 덕에 그는 그의 삶이 다시 제 경로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매일 빙빙 돌게 되는 그의 오피스텔 근처 도로가 체력훈련 때마다 뱅뱅 돌던 그 트랙 같이 느껴졌다. 그가 사는 오피스텔의 불이 켜지는 것까지 지켜본 후 그는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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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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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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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없음.
xx. xx. xx
주기적으로 멀리 외출하고 돌아옴.
돌아다니는 기준은 아직 파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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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박물관은 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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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여자랑 만 약속. 저녁을 먹고 헤어짐.
애인?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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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2시간 동안 오피스텔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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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사흘간 귀가 시 이상행동 발생.
오피스텔 대문에서 5분 정도 들어가지 않고 서 있음.
이쪽을 쳐다본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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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설마 저 새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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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 종수의 집(낮)
사고는 아주 갑작스러웠다. 정확한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에 빠진 몸은 예상만큼 무거웠다. 푹 젖은 옷에서 물이 줄줄 떨어지는데 앞머리에 들러붙는 땀이 느껴질 정도로 몸에 열이 돌았다. 정신 없이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짓단에서 흐른 물이 조수석 발매트를 흠뻑 적실 때까지도 남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아니면 집으로? 그가 사는 오피스텔 위치는 알았으나 도어락 비밀번호까지는 몰랐으므로 결국 그는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남자의 젖은 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던져두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그제야 그는 조금 명확한 정신으로 침대 위의 남자를 확인한다. 지켜보는 속도 모르고 누워있는 이의 가슴이 조용히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누가 보면 남자의 침실에 몰래 그가 침입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평하게 잠든 것 같은 모습. 생각해보면 빠져 뒤지기에는 물이 얕았던 것도 같다. 깨닫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미친놈. 괜히 사람 놀래키기나 하고…….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 그는 태평한 낯짝을 노려본다. 시선이 가슴에서 위를 향한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퍽 길었다. 천천히 이목구비를 뜯는다. 늘 반듯하다고 생각하던 얼굴 조형. 감시 대상을 정면에서 가까이 마주 볼 일은 주로 없다. 그는 마치 사진을 보는 기분으로 남자를 내려다본다. 그는 바로 이 방에서 그 사진을 들여다봤었다. 멈춰 있고, 이쪽을 바라보고, 시원하게 웃던 입꼬리를……. 남들보다 도톰한 입술이 조각처럼 미동이 없다. 남자는 잠들어 있었다. 그가 지켜보던 남자는 항상 눈을 뜨고 있었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고, 깨어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진도 아니면서… 멈춰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때까지 그는 남자가 자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문득 남자가 아예 죽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남자도 혹시. 반사적인 두려움에 그를 흔들어 깨우려는 순간 가느다란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힌다.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남자의 숨소리가…….
토끼 굴에 빠져버린 기분.
깨닫자마자 속에서 벌이 날아다닌다. 하루종일 지켜보던 남자가 그의 집에서, 그의 옷을 입고, 그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순간 그의 방이 아주아주 낯선 장소처럼 느껴졌다. 오직 한 사람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아예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속이 자꾸만 버글버글 끓어 견딜 수 없었다. 그를 깨울 수만 가지 방법이 떠오르는 동시에 그를 깨워버릴까 겁이 났다. 이상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방을 떠나야겠단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병원이나, 하다못해 서장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방문을 열고 나가면 이 낯선 공간이, 이 낯선 공기에 의해 무언가  ̄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것만큼 엄청난 일이.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가 깨어날 때까지 한 시간을 꼬박 앉아있었다. 눈꺼풀이 떨리자마자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뺀다.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천천히 남자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어디야?”
그는 조금 멍청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
남자는 조금 놀란 눈으로 누워있는 침대와,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가, 방안을 한바퀴 둘러보고, 이윽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도 의심도 없이 설명만을 원하는 시선. 그는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굳는다. 죽을 뻔한 그를 구해줬는데도,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선생님한테 혼나는 어린애마냥 안절부절 했다. 그는 결국 어물어물 입을 연다. 너 물에 빠졌었어.
내가? 어, 그런데 정신을 잃어서. 갈곳이 없어서 일단 우리 집으로 왔어.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곤란해질 것 같아서…. 내가? 어. 내 옷은 어디 있어? 밖에 널어놨어. 지금쯤 다 말랐을거야. 마를 때까진 일단 내 옷이라도 입혀놨어. 사이즈 비슷해 보이길래……. 한 마디 한 마디 그는 정말 등신처럼 말했고 남자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남자가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잠깐 현기증이 났었나봐.”
놀랍게도, 남자는 이 상황이 별로 놀랍지 않아 보였다. 그럴 수가 있나? 생각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 그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모르는 곳에 있기도 해.”
“물에 빠진 적도 있어?”
“아니. 어디 빠진 건 처음이야.”
“거기는 왜 간거야?”
“원래 이곳저곳 자주 돌아 다녀.”
“원래도 그렇게 정신을 잃어?”
“말투가 되게 직설적이네.”
그 말에 그는 아차 싶어 빠르게 덧붙였다.
“무례할 생각은 없었어.”
“무례한 게 아냐. 직설적인거지.”
그게 그거 아냐? 흘긋 바라본 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쯤에서 그의 무례에 언짢은 기색을 보이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나지 않았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전혀.
“오히려 널 알게 되어 행운인 것 같은데.”
창문을 넘지 못했던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그의 이목구비만큼 단정하며 깔끔했다. 나긋한 음성이 꿈결같이 속삭인다. 하지만 우린 서로를 전혀 모르네.
“내 이름은 규야.”
그렇게 말하며 규는 웃었다. 눈썹을 내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웃음. 종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다.
S#4. 종수의 차 안 (낮)
“직업이 뭐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거.”
“나 따라서?”
“어. …어, 어? 뭐?”
“내가 쫓아다니는 것도 모를 줄 알았어?”
하하하. 쭈뼛 몸을 세우는 종수를 보며 규는 파하학 웃었다. 아버지도 참.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내 나이가 몇갠데……. 그나저나 왜 모른 척 해? 우리 인사도 했잖아. 샐샐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는 규를 보며 종수는 그만 팩 하고 시선을 돌린다. 창문에 팔을 괸 채 이쪽을 쳐다보는 눈에 자꾸 손이 떨렸다. 주시당하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핸들만 쥐어뜯고만 있자 다시 규가 입을 연다. 종수야, 그거 알아? 혼자서면 그냥 돌아다니는 거고, 둘이 함께 다니면 늘 행선지가 생긴대.
/
“종수, 왔어? 많이 기다렸지.”
“어.”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창문 너머, 망원경의 렌즈 너머, 겹겹의 유리를 뚫고 그가 나의 차 안까지 들어올 때까지  ̄ 모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규는 사진처럼 웃었고 종수는 그걸 가까이서 봤으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차안에서 규가 놓아준 방향제 향이 났다. 종수는 그 안에서 규를 기다리면서 생각을 하거나 집에서보다 편하게 꾸벅꾸벅 졸았고, 오피스텔 대문에서 들어가는 규에게 합법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규가 익숙하게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맬 때가 되어서야 종수는 괜히 놀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그는 결단코 이렇게 빠르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친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오피스텔 근처를 배회하는 규를 잡아 세운건 분명 종수였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번호를 몰라서 찾아왔다는 말에 아무 말도 안하고 번호를 준 것도 종수 자신이었다. 그가 자신의 차창을 두드릴 때 차문을 열어준 것도…….
“어디로 갈래?”
차에 탄 규는 항상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묻는다. 네가 가는 곳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종수는 뾰족하게 대꾸한다. 그딴걸 왜 물어? 어딜 가든 난 너 쫓아다녀야 하는데. 그러나 규가 웃으면 종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그가 좋아할 법한 장소를 말하곤 했다. 규의 앞에서 종수는 자주 이상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한 일만 연달아 일어났다. 항상.
S#5. 종수의 차 안 – 강원도 칠성산(저녁-밤)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국도로 들어선 지 막 30분이 지났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이 점점 낮아지고 길옆으로 푸른 논이 듬성듬성 깔렸다. 저 멀리 하늘에서 샛별이 아룽거리기 시작했다. 지역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지나자 짧은 다리 하나가 나온다. 요근래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다리 아래 시내는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잡초들이 개천을 빼곡하게 메운 다리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자 산을 끼고 도는 도로가 굽이 굽이 펼쳐진다. 여름 밤은 짧지만 산속은 언제나 빠르게 땅거미가 내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맞은 도로 표지판들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느린 곡조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자동차가 가볍게 덜컹거릴 때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간헐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아직 멀었어? 종수가 묻고 규는 조금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시작부터 조금 이상한 날이었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날은 여전히 푹푹 쪘다. 실수로라도 에어컨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오후, 평소보다 늦게 만난 규는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종수의 차를 보자마자 짧게 웃었고, 여느 때와 같이 조수석에 타지 않고 운전좌석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자 더운 공기와 함께 규의 향수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같이 갈 곳이 있어.”
행선지를 그가 정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꽤 머니까 내가 운전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석 문을 손수 열어주던 길쭉한 손. 앉을 일 적던 조수석에 앉자 무언가가 피부를 간지럽힌다. 건조하던 차내의 공기와 섞인 바깥의 습기, 규가 사준 방향제, 그리고 또 무언가.
차는 점점 산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규는 퍽 익숙하게 빠져나간다. 룸미러로 훔쳐본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운전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뒤바뀐 위치에 말주변도 함께 바뀐건지 운전대를 잡은 규는 평소보다 말수가 없었다. 평소 시끄럽던 녀석이 조용하자 종수도 괜히 눈치가 보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평소였다면 뭐하는 짓이냐고, 차를 돌리라며 성질이라도 냈겠으나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차 안 에어컨에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빠져나온다. 룸미러로 훔쳐본 규의 표정은 멀쩡했다. 영문 모를 일의 연속. 이쯤 오면 무슨 일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건지 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피곤해?”
참다 못해 종수가 묻는다.
“대체 어디 가는건데?”
지역 이름이야 네비게이션에 표시되고 있었으나 이름만 안다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규는 또 웃는다. 올라가면 다 알게 될 거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에 종수는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종수는 신경질적으로 빨대 끝을 씹었다. 만나기 전에 샀던 아이스 커피의 컵홀더가 젖어 불쾌하게 눅진거렸다. 완전히 모르는 타지,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규와 낯선 상황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 카페인이 들어간 심장이 너무 쉽게 두근거렸다. 쿵쿵 머리를 울리는 멀미를 닮은 거북함. 생각이 다시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진다. 다른 사람이 된다는 서장의 말. 그러고보니 그는 규에게 언제 정신을 잃는지 대답을 듣질 못했다. 종수는 또다시 규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차는 이윽고 갓길에 멈춰 선다.
가드레일 너머 빈 땅이 보인다. 접근 금지 줄 너머로 펼쳐진 작은 공터. 그 옆으로 작은 샛길이 하나 보인다. 길 아래 쪽에 대여섯 정도 되는 낡은 주택이 있다. 시동을 끈 규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려, 종수야. 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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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원래 칠성사라고 절이 하나 있었어. 여기서부터 저쪽 집들이랑, 저 뒤쪽으로 싹다 절터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도로를 까니 재개발을 하니 하면서 말이 많았는데. 근데 이쪽에 무슨, 신라시대 때부터 있던 탑이 있었다나? 그래서 이 땅만큼은 문화재 복원이니 뭐니 하며 안 건드렸는데… 여전히 이 모양이네. 참. 할거면 제대로 할 것이지.
뭐, 중요한 얘긴 아냐. 이거나 보려고 온건 아니니까.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고개를 좀 들어봐.
하하, 예쁘지? 여긴 항상 유독 별이 잘 보이거든. 오늘 날이 맑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고향도 좀 와 볼 겸, 같이 별구경 하러 왔지.
종수야, 저기 저 별 보여? 응. 저기 왼쪽 하늘에. 유독 반짝이는 거 말야.
그거 알아? 시간이 지날 때마다 별도 같이 움직이는 거. 그래서 옛날이랑 지금이랑 별 위치가 다르대. 그러니까 저 별은 옛날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있었다는거지. 저기, 내가 가르키는 곳 보여? 응. 잘 찾네.
저 별이 저 근처에 있을 때 내가 태어났고, 저기 근처에서 죽었어.
내가 왜 입양을 온 건지 알아?
(insert) 칠성 七星,
그것은 별의 이름이자 산의 이름이며 뱀의 이름이다.
바다에서 나 산기슭에 또아리를 튼 뱀은 정기가 좋은 마을에 터를 잡고 처녀를 지켜주는 당신으로 자리 잡았다. 칠성을 잘 모시면 그녀와 가족들의 건강과 집안의 부를 가져다주지만 잘 모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병을 일으킨다.
칠성은 딸에서 딸에게로 전해진다. 한 대에서는 무조건 딸이 하나씩은 태어났으며 칠성을 모시는 처녀들은 자신의 몸에 칠성을 품고 낳은 딸에게 칠셩을 물려줌으로써 대대로 뱀을 ‘모시게’ 된다.
특이한 점은 칠성이 다른 당신들과 다르게 조상신의 형태 또한 띈다는 것이다. 조상손은 가시손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옛날에는 한 처녀가 칠성을 오래 모시고 있거나, 칠성과 과하게 가까이 지내면 화를 초래한다고 믿어져 딸들은 꼭 고향을 떠나 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조상들과 멀어져야 했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아들만 태어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맞지 않는 몸에 들어간 뱀의 화를 몹시 두려워해, 그런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의 딸을 양자로 맞거나, 이도 여의치 않을 경우 다른 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해 최대한 그들의 조상과 멀어지는 방법을 택하곤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런 아들들은 주로 하나 같이 스물 여덟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28은 실제로 여러 의미를 가진 숫자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구분할 때 하늘을 삼계와 제석천을 합하여 총 28천으로 나누며, 황도를 중심으로 운행하는 별자리의 개수 또한 총 28수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와 수명이 실제로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는다.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정말로 신인지, 아니면 조상들의 흔적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S#6. 칠성산 (밤)
“…그건 어머니가 말씀해주신거야?”
“아니.”
“그럼 서장님?”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종수야.”
그냥 나는 알아. 신경쓰지 않아도 돼. 이건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까. 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 끝에 그 별이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규가 종수는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야. 그의 옆모습을 뜯어보던 종수는 깨닫는다. 서장이 옳았다. 이건 ‘규’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규의 탈을 쓰고 있었다. 어깨를 낚아챈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간다. 당장 이 몸에서 꺼지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깨를 잡힌 규가 잠시 비틀거리다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종수도 머리가 아팠다. 앞만 바라보는데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속눈썹이 떨릴만큼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괴로운 표정으로 규가 입을 연다.
“종수야.”
종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온갖 단어를 그러모아 봤으나 그게 입술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냥 알아? 중요하지 않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디를 다녀온거야. 어디로 가는거야? 아까까지는 분명 네가 아니었어. 그건 누구야? 누가 널 데려가는거야? 가지마, 너는 지금 나랑 같이 있잖아. 목이 메이는 느낌에 종수는 그대로 규를 끌어안는다. 손에서 힘을 풀면 그대로 규가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아 규의 옷을 틀어잡았다. 그런 종수를 아랑곳 않고 규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연다. 긴 복도를 걷고 있었어.
“한때는 거울로 되어있었고 지금도 파편이 이리저리 매달려있는 통로. 파편들을 들여다보면 많은 게 보여. 그건 기억이야. 하지만 난 그런 걸 본적이 없어…….”
“끝부분은 어둠 뿐이야. 하지만 난 알아. 그 끝에 다다르면…….”
“…다다르면?”
“끝이지. 그 끝에 빈 자리가 있어.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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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 애의 친가? 아냐. 연락은 그쪽에서 먼저 끊었어. 생떼같은 자식 하나 살리자고 입양을 시킨건데 그쪽에서 먼저 찾아올 리가 없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말라고 나한테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
[뭐? 고향?]
[무슨 소릴 하는겐가? 태어나서 서울을 떠난 적이 없는 앤데. 강원도? 그럴 리가. 그 애 어머니도 서울에서 커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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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튼 적이 없었는데 화면이 파랬다. 눈을 뜨고 자기라도 한 건지 눈 안쪽이 따끔거린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깼냐고 묻는다. 규의 무릎에 누워본 적은 없었는데 생각만큼 부드럽지는 않다. 재미없어, 종수야? 보다가 자꾸 조네. 뻑뻑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자 풍랑에 뒤집히는 배가 보인다. 허우적대는 남자… 이런 장면도 있었던가? 옛날에 몇 번 본 영화 같은데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결말이 유명한 영화는 대개 앞부분은 도외시되기 마련이다.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주로 마지막 장면 뿐이니까.
인위적으로 만든 파도를 겨우 빠져나온 남자가 하늘을 보며 웃었다. 잔잔해진 물살처럼 머리를 빗어내리던 손가락이 귓등을 간지럽힌다.
“그딴 임무, 처음에는 진짜 맡기 싫었어.”
“그래?”
“어.”
“그래서 후회해?”
“아니.”
“왜?”
“너는 내가 살릴 수 있었잖아.”
김성진이나 동료처럼, 내가 멍청하게 놓치지 않고 ̄. 아주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그런지 목이 조금 잠겨있었다. 머리 위로 짧게 웃음이 부스러진다. 네가 내 증명이었어. 티비 속 남자가 드디어 세상의 끝에 다다다르고 영화가 막바지에 접어든다. 내가 너와 이 영화를 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 영화 본 적 있어?”
“아니.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은 좋아해.”
“그 사람이 포기하면 어쩌려고?”
“주인공에겐 원래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법이지.”
“그런게 왜 좋은데?”
“끝내 이겨낼 걸 알거든.”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 마지막 인사가 끝나기 전에 네 손에 들린 리모컨을 잡아채 버튼을 누른다. 세상을 하나 뒤집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다. 세상을 벗어난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는 피지에 잘 도착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TV가 켜져 있는 한 늘 새로운 프로가 나올거라는 점이다. TV 속에 낯설지 않은 이들이 보였다.
“여긴 왜 온거야?” 화면 속 남자를 대신해서 물으면 화면 속에 규가 대신 대답했다. 괜찮은 배경이 필요하다고 했어.
누가?
묻지 않기로 했잖아, 종수야.
아니라고 말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정해진 일이야. 나도 바꿀 수가 없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네가 죽어야한다고 했다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왜?”
미안해. 내가 널 끌어들였어. 내가 욕심을 부렸어. 이렇게나 지체해서는 안됐는데.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그만 너무 기뻐서….
“규.”
“응.”
“칠성 말이야, 거짓말이었지?”
“아직도 못 믿겠어?”
“원래부터 안 믿었어.”
무슨 뱀이니, 조상신이니… 다 미친 소리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누구나 보여지는 세상이 진실이라 믿고 살기 마련이라지만, 믿을 수 있는 얘기를 해야 믿어주지. 믿고 싶어지게 만들어야 들어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생각해봐, 규. 한 번만 제대로 기억해봐. 분명 네 기억 속에 있는 곳일거야. 노력해봐. 나를 위해 해봐. 넌 죽을 이유가 없어. 전부 다 악몽일 뿐이라고. 넌 지금 깨어있잖아. 여기, 여기 나랑 같이 있잖아.
네가 어떻게 내 고소공포증을 알았을까?
…그렇게까지 나랑 헤어지고 싶어?
아냐, 종수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냐.
그렇다면 증명해.
종수야, 제발. 너무 늦었어.
아냐!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 두고 가지마. 나랑 있는 게 너잖아. 네가 날 사랑하는 거 알아. 너도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잖아. 그거 말고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규.”
함께 하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화면 너머의 너는 무척 슬퍼 보이는데. 고개를 돌지 않아 네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다. 종수야. 입을 열지 못하는 그 대신 네가 마지막 대사를 읊는다.
“내가 떠나고 나면, 나도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될거야.”
유리 너머의 그가 카메라를 벗어났다. 리모컨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머리 위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가는 앤드롤에 네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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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링 중이셨어요?
잠이 안 와서. 할 수 있는 게 지켜보는 것 뿐이니 확인이라도 해야지.
또 저러고 자네, 안쓰럽게시리. 상태는 어때요?
여전해. 계속 상담도 시키는데 달라지는 게 없네.
…저, 감독님.
왜?
뭐가 문젠지 이미 아시잖아요.
….
최종수가 그를 사랑해요.
알아. 그래서 일이 복잡해졌지.
더 문제인 건, 그가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