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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담』 패러디

 

https://youtu.be/1hfDkxVsOy0

 

 

 

 

이규. 어깨.

 

또 잠을 못 잤어?

 

피곤해.

 

몇 시에 잤길래?

 

몰라. 세 시인가...

 

내가 밤에 유튜브 좀 그만 보랬지, 종수야.

 

시끄러워. 

 

 어깨에 올려지는 머리가 묵직했다. 아직 허락도 안 했는데. 어휴, 피곤하다는 듯 부러 한숨을 쉬어도 그깟 숨결로 태풍을 몰아낼 순 없었다. 앙갚음이라도 하는 듯 부러 뼈에다 대고 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통에 이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목께에 닿는 머리칼이 간질거려 그는 잠깐 눈을 깜빡인다. 

 

 30분 있다 깨울게. 대답대신 가볍게 어깨에 머리가 부벼진다. 이규는 동그란 가마를 흘겨보다 잘 자라는 의미에서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딱 붙어있으니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는 대신 오랜만에 이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한 게 영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곧 눈이라도 오려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규는 최종수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돌아올 이유

 

 

 

 

02.

 

  최종수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오직 이규만이 그것의 부재를 눈치챘다. 코트 위에 떠 있는 농구화엔 어떠한 음영도 없어 퍽 기묘했다. 제 홀로 바닥을 유영하는 까만 구체는 선득할 정도로 이질적이라 이규는 어쩐지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오직 최종수만 다른 세계에서 오려내어, 억지로 이곳에 붙여둔 듯했다. 이규는 생각한다. 종수의 분신은 어디로 간 걸까. 너는 네 일부를 칠칠치 못하게 어디에 떨어트리고 온 걸까.  

 

 

"그딴 게 중요해?"

 

 

 상념은 한마디 말에 의해 단절된다. 고개를 들면 어느새 태풍이 그를 응시하고 있다. 내리찍는 시선이 서늘했다. 그림자대신 기이함이 네 발치에 따라붙기라도 하는 듯 공기가 어두워진다. 소용돌이 같은 눈동자가 이규만을 담는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체육관이 서늘했다. 종수는 정물화처럼 코트 중앙에 서있다. 끌려들어 가는 느낌에 이규는 반사적으로 눈을 접어 웃어 보인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종수야. 

 

 중요하냐고. 명백한 우회의 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정파 무인의 표본이었다. 노려보는 시선이 점점 매서워졌다. 체육관을 가득 채우는 폭풍에 이규는 피하지 않고 눈을 깜빡인다. 그렇게 정적. 짧은 심문이 이어지고 머금던 미소가 흐려질 때쯤 기어이 이규는 실토한다. 그건… 아니지. 모나던 시선은 그제야 아주 조금 둥글어진다. 

 

 "그럼 됐잖아."

 

 도대체 무엇이? 이규는 물음을 애써 삼키고 다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볼은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고 네트로 빨려 들어간다. 초식을 초월한 경지는 언제 견식 하든 놀라울 따름이다. 굿샷. 오늘 슛은 여기서 끝이야? 어. 500개 다 채웠어. 벌써? 빠르네. 세려 달라고 했을 텐데.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흥.

 

 "디펜스 연습할 거야. 일어나. "

 

 태연하게 덧붙이는 낯은 흔들림 하나 없고,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곤 평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이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나 먼저 들어갈까? 마음대로 해. 

 

 체육관 내 울리는 마찰음은 두 개, 서 있는 사람도 둘인데 그림자는 오직 일 인분 뿐이다. 집중하라는 말을 핑계 삼아 이규는 바닥에서 겨우 시선을 뗀다. 오른 다리의 시큰거림을 애써 무시한다. 

 

 

 

一.

 

이규가 가진 괴악한 취미는 그 재미도 없는 무협지를 포함해서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온갖 괴담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오컬트 쪽 채널을 구독하거나 공포영화 스토리 같은걸 주로 들었는데, 스님처럼 생겨가지고 답지 않게 귀신 이야기 같은 걸 좋아해서, 까딱 잘못 훔쳐봤다간 괜히 밤잠을 설치게 되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호기심에 어깨너머 들여다본 임승대가 질색을 하는 걸 몇몇 농구부원이 목격한 바 있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지만 엄지가 움직이진 않고, 경기 때처럼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이번에도 그런 이상한 이야기나 듣고 있겠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니 눈동자가 제 쪽으로 굴렀다.  종수, 왔어? 그딴 걸 왜 봐. 한 치의 존중도 없는 어조를 이규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흘려보냈다. 너도 별 영상 다 보잖니. 기왕 온 거, 너도 볼래?

 

  아, 봤다가 잠 못 자면 그건 또 그거대로 큰일인데. 야. 한껏 놀리는 투에 최종수가 으르렁대자 이규는 몇 번 키득대곤 이어폰 한쪽을 넘겼다. 단조로운 여성의 내레이션에 최종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귀신 귀, 정신 신. 鬼神.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고 하는 넋이라고 할 수 있죠. 서양에서 한 과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 

 

"이규."

 

 "응."

 

 "귀신을 믿어?"  

 

 "괴력난신을 믿는 건 정파무인답지 않지? 보지 못하는 걸 믿는 건 좀 그렇잖아." 

 

툭. 가볍게 머리를 기대며 이규가 중얼거렸다. 맞닿은 체온에 괜히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최종수는 답지 않게 질문했다. 그럼, 영혼 靈魂도?

 

 

03.

 

 도시 괴담과도 같은 일이 인터넷을 달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시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찔리고 으깨진 고깃덩이들은 상흔마다 끈덕지근한 악의를 주렁주렁 매단 채 안치소에 눕혀졌다. 부검의는 모두 동일범의 소행일 거라 진술했다. 대상은 모두 성인 남성. 난도질을 쳐서 죽이는데, 유독 집요하게 오른쪽 다리를 노린다고. 

 

 도로 위에 뿌려진 피가 늘어갈수록 이규의 낯에선 핏기가 빠졌다. 괜찮냐고 묻는 종수의 말에 이규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의 통증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멀쩡한 X-ray 사진을 가리키며 의사가 입을 열었다. 

 

'저번 사고의 후유증일수도 있어요.'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서는 중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어. 승대? 응? 종수가 왜? 뭐?

 

이규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통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규."

 

 따라오던 종수가 뒤에서 그를 부른다. 이규는 도무지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05.

 

요즘도 잠을 못 자?

 

아니.  피곤해서, 머리만 대면 그대로 뻗어.

 

이상한 꿈같은 건 꾼 적 없고?

 

기억 안 나. 

 

 … 그래?

 

 그런 건 갑자기 왜.

 

아냐, 아무것도. 잘 잔다니 다행이네.  

 

… 

 

불 끌게. 쉬어. 

 

어.

 

 

 三.

 

 몸은 동시에 추락했다. 부딪힌 다리가 끔찍하게 아프고, 시야가 흐릿했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구하러 오기 전에 모든 게 끝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규는 최종수의 손을 잡는다. 괜찮아, 종수야. 나갈 수 있을 거야. 이 정도 사고는 곧 신고가 들어와. 정신 차리고 있어. 곧 사람들이 구하러 올 거야. 나는 괜찮아. 많이 아파? 너무 걱정하지 마. 부러진 것 정도는 요양 끝나면 되는 거 알잖아. 내가 보기에 인대 파열은 아닌 것 같아. 나 관찰력 좋은 거 알지? 이정도면 재활하면 괜찮을 상처야. 버티고 있으면 사람들이 올거야. 농구도 다시 할 수 있을거고. 조금 쉰다고 망가질 최종수는 아니잖아. 고작 이런 거에 질 생각은 더더욱 아닐거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 나 여기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돼. 맞잡은 손은 조금 떨리고 평소보다 미적지근했지만 차갑진 않았다. 실현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건 언제나 이규였고 그래도 최종수는 이규의 말은 믿어주는 편이었다. 종수야. 어. 재활 끝나면 훈련 빡세게 해야겠네. 그러게. 그렇게 어떻게든 버텼고, 정말로 사람들이 찾으러 왔다. 구해지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06.

 

종수가 1년 전에 사고로 죽었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09.

 

 새벽녘의 공기는 언제가 되었듯 시리다. 눈이 오고 있는 한겨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발밑에 우그러지는 눈소리가 시끄럽다. 날이 지독하게 추웠다. 기록적인 한파라고 하더니 뼈가 시린 것 같다. 누군가 제 다리를 송곳으로 제 다리를 쑤시는 것만 같아 이규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긴다. 눈밭을 해치고 달려오느라 숨이 찬 건지, 눈앞에 닥칠 현실에 숨이 막히는 건지 이규는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른다.  

 

 

“최종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던 손이 우뚝 멈춘다.  하얀 눈 위로 점점이 뿌려진 붉음이 한바탕 요란스럽다. 시커먼 져지임에도 티가 날 정도로 낭자한 선혈에 이규는 그만 정신이 혼미했다. 비명대신 이규는 다시 호명한다. 종수야. 그제야 인형은 뒤를 돈다. 초점이 흐린 눈이 저에게 고정되는 것을 이규는 퍽 긍정적 신호로 여긴다. 적어도 말을 들을 정신은 있구나. 정신이라. 원귀에게도 그런 것이 있던가. 요동치며 범람하는 수천수만의 생각 속에서 이규는 표류한다. 꾹꾹 눌러 담아 왔던 말이 입김과 함께 터진다. 이제 그만해. 

 

너 억울한 심정, 내가 다 알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종수야.

 

  불완전한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너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태초부터 덮어두었던 것들이 발밑에서 출렁인다. 객귀는 아무런 응답도 없다. 이규는 할 수만 있다면 눈을 감아버리고만 싶었다. 공이 아닌 흉기를 들고 있는 종수의 손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곳은 무기 하나로 웬만한 갈등이 모두 해결되는 무림이 아니었고, 애초에 일반인에게 휘두르는 검은 고결한 검술이 아닌 야만적인 폭력일 뿐이다. 눈먼 차량이었다. 하지만 네 밑에 깔려있는 저 사람도, 네 손을 거친 그들 모두 그 차의 주인은 아닐 것이다. 정도에서 벗어난 강자는 무림공적이 된다. 방향을 잃은 힘 앞에는 몰락만이 남는다. 그 무엇도 최종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규는 진실로 궁금했다. 눈앞에 있는 저것은 정말 종수가 맞는가. 아니라면 역시 나는 널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맞다면 너는 왜 여즉 이곳에 못 박혀있는가. 죽음은 영원한 안식 이랬는데, 도대체 너는 왜 또다시 잠들지 못하고 이 밤을 홀로 헤매고 있을까. 이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꼬챙이에 꿰인 물고기마냥 헐떡거리며 겨우겨우 지껄인다. 농구선수가 손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깝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은 다치지 말자고 나랑 약속했으면서. 종수야. 우리가 더 이상 같이 뛰진 못하지만…

 

 

 

四.

 

 "하지만, 우리 함께 있잖아."

 

 

 

九.

 

 이규. 

 

길을 잃은 망자亡者가 그를 부른다. 남은 것이 참담하게 낯을 구긴다. 종수야, 제발. 

 

 이규의 디펜스는 한 번도 최종수에게 통한 적이 없다. 날붙이가 다시금 허공을 가른다. 

 

 

 

 

 

***

 

 

 

 하얀 가루가 작은 세상 속에서 흐드러진다. 유리 돔 안에서 소용돌이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반짝이가 섞인 가짜 눈이 물 안을 유영하다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가만히 앉아 폭풍과 고요를 반추하는 종수를 규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저 스노우볼은 규의 선물이었다. 삼류도 되지 못한 이들의 첨언에, 하나뿐인 제 천하제일이 주화입마라도 올까 걱정되어 명상할 때 -즉, 멍 때릴 때- 쓰라고 사다 준 것이었다. 받을 때는 뭐 이런 걸 주냐며, 심마를 다스리는 구결을 읊어줄 때도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어디 구석에 처박아둘 줄 알았는데, 웬일로 종수는 그 선물을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시간이 나면 저렇게 가끔 들여다보곤 했다. 생각보다 잘 가지고 노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고, 적어도 유일한 벗이 심마로부터 한 발짝 멀어졌다는 마음에 안심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좋은 기분에 규가 웃으며 물었다. 

 

 "그게 그렇제 재미있어?"

 

 시선이 규쪽으로 데구룩 굴렀다. 종수는 잠시간 말이 없다, 톡톡. 기다란 검지로 유리 표면을 두드렸다.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 같아서.

 

 

 체육관 앞에 벤치 있잖아. 

 

 아, 우리 훈련 끝나면 가끔 앉아있는?

 

 그제야 규는 유심히 안을 들여다본다. 눈이 소복이 쌓인 중심에 있는 작은 벤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다. 어라, 그러게. 가로등까지 비슷하네. 여기 이렇게 기대고 있는 것도 같고. 신기해라. 그때 내가 이걸 보고 샀던… 

 

 잠깐만. 규는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래서 매번 보는 거야?"

 

   종수는 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고운 아미가 와락 찌푸려졌다. 무척이나 언짢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다년차의 경험으로 유추하자면 저건 쑥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머리칼이라도 닿은 듯 속이 간질거려 규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종수야, 램프 좀 켜봐." 

 

   규가 불을 끄고 종수가 램프를 켰다. 어둑어둑했던 실내에 덩그러니 광원이 놓였다. 그거, 이렇게. 이규의 손짓에 종수가 스노우볼을 램프 앞에 가져다 댔다. 익숙한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왔다. 

 

 나풀거리며 날리는 눈. 벤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 익숙한 그림자가 길게 뻗어나왔다. 최종수가 팔을 뻗어 전구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림자는 점점 더 크고 길어졌다. 흐리고 커다란 그림자가 창문까지 번졌다. 창문을 가득 채운 두 인영에 슬그머니 웃음이 삐져 나온다. 예쁘네. 느슨하게 풀리는 표정을 보며 이규는 몰래 입꼬리를 당겼다. 문득 장난기가 돌아 창문에 내리는 눈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이규는 팔을 뻗었다. 

 

 "어."

 

 때문에 종수의 표정이 순간 사라지는 것을 규는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문을 열어두지도 않았는데도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종수의 낯이 순간 창백해졌다. 규는 순간 방에 정말 눈이라도 내렸나 헷갈렸다. 급변한 분위기에 규는 당황스러웠다. 종수야? 무슨 일이야?  잠깐, 잠깐만. 

 

 야.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종수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 봐. 

 

 영문모를 요구에도 이규는 순순히 응한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니 빛이 가까워져 점점 눈이 부셨다. 램프가 이규의 시야에서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다. 그림자들이 빛을 피해서 이리저리 너울졌다. 빛 때문에 규는 종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종수야. 왜 그래? 거듭 부름에도 최종수는 응답이 없었다. 

 날카로운 침묵 속에서 종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야, 이규.

 

 

"너 왜 그림자가 없어."

 

 

규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누군가 오려낸 듯한 윤곽선이 보였다. 

 

 

 

[ 너 괜찮냐? 병원은 가본 거야? 분명 사고 이후에 상담 같은 거 붙지 않았나. 근데 상태가 왜 이따위고.  야, 최종수. 정신 차려. 이규는 이미… ]

 

 

 

 

 종수, 나 장도고 가기로 했어. 또 같은 문파 소속이네. 표정이 왜 그래? 솔직히 어느 정도 정해진 거였잖아. 응? 안 괜찮을 거 뭐 있어. 너랑 함께인데.  

 우리는 쭉 합을 맞춰왔으니까, 같이 올라가면 실력에 기복도 없을 거고. 네 무공에 대해서는 그나마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전술 짜는 것도 편할 거고. 게다가, 실력이 맞는 대련 상대를 새로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잖아. 후지기수 중에서도 나만큼 내공을 쌓은 이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아무리 강자는 고독한 법이라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거 알잖아. 

 

 종수 네 실력은 강호의 일절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 혼자 할 수는 없잖아. 누군가는 너와 함께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나는 너랑 이기고 싶어. 

 

 음, 나도 알아. 천하제일의 곁에 서려면 마땅한 격을 갖춰야겠지. 기다려. 다음 용봉지회에는 혼자 보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먼저 널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종수야."

 

 

 

-

 

 거진 반파된 차량을 발견했을 때 너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한다. 네 쪽의 에어백은 고장이 나있었기에, 처음 충돌이 있을 때 목이 꺾여 즉사했을 거라고. 그러니 나랑 대화를 나눌 순 없었을 거라고. 나도 사태가 퍽 심각해서, 그때 정신을 잃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들은 떠들었다. 

 구조대가 나를 꺼내기 전까지 너는 쭉 내 손을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 죽은 네가 날 살린 거라고. 

 

 

  야, 이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규가 죽었다고 하지만 그때 죽은 건 그가 아닌 최종수였다. 최종수는 알고 있다. 그날밤 나는 죽었다. 

 

 

 

01.

 

 너는 차라리 그때 나를 데려갔어야 했다. 끝까지 잡고 있던 그 손 그대로, 다 괜찮을 거라는 허울 좋은 말 대신 같이 떠나자 했던 나를 원망했어야 했다. 정신차리라는 말 대신 내게 하고 싶던 말을 한 마디라도 더 했어야했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지키지 않을 말로 나를 안심시켜서는 안 됐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는 떨어질 일이 없었다. 서로의 곁에 서로가 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너는 나에게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이렇게 나를 외롭게 둘 바엔 잡은 손 그대로 저승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던 까닭은 서로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게 있을지언정, 적어도 말한 것은 꼭 지키기 때문이었다. 이기겠다는 말이 그랬고, 따라오겠다는 말이 그랬다. 나는 네 전술에 따라 볼을 넣었고 우리는 함께 이겼으며 너는 U18에 발탁되었다. 암묵적인 합의는 그렇게 비롯되었다. 

 

  이규는 최종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종수야."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눈 위로 뿌려졌던 피가 맥동했다.  최종수는 제 손을 내려다본다. 살을 엘듯한 바람에도 손은 식지 않았다. 죽은 자의 온기가 끝없이 손을 덥혔다. 삶의 흔적이란 이토록 뜨겁다.  

 최종수는 규의 손을 생각한다. 주인이 열이 많아 잡으면 늘 제 손보다 따듯하던, 훈련 후에는 달아올라 뜨끈하고 바람을 쐬어주면 이내 원래대로 곧잘 돌아오던, 익숙한 위치에 굳은살이 박힌, 언제나 제게 공을 연결시켜 주고, 졸고 있던 자신을 깨워주던. 끝까지 제 손을 놓지 않던 네 손을 떠올린다. 아무리 더울 때도 네가 먼저 손을 뺀 적은 없었다. 종수 손은 차갑구나.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잡아줄 너를 기대하며 최종수가 겨울을 기다리곤 했음을 이규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거 이리 줘.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

 

  그의 공범자가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저에게 손을 내민다. 최종수는 여전히 그가 제 손을 놓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최종수는 규를 보며 오래 전의 고백을 강제한다. 눈가에 내려앉은 눈이 체온에 녹아 흘러내린다. 

 

 

 "약속을 지켜, 이규."

 

  너는 늘 그랬잖아. 

 


 

 "그래도 영혼의 존재 정도는 믿고 싶은데.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0.

 

 밤바다도 나쁘지 않고 좋네.  희뿌연 입김이 바닷바람 사이로 흩어진다. 일정하게 몰아치는 파도가 신발 코를 적실 듯 말 듯 간질였다. 규는 시린 듯 붉어진 귀를 감싸며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그런 옆모습을 눈에 박아 넣으며 최종수가 대답한다. 그러게. 시선을 느낀 규도 돌아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종수야, 춥지 않아? 

 

  조금.

 

  규는 퍽 자연스럽게 최종수의 손을 잡는다. 세상에, 손이 너무 차가운데? 괜찮아? 어. 어차피 네가 잡아줄 거잖아. 너도 참… 최종수는 잡은 손에 힘을 더한다. 얽혀오는 손가락은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다. 

 

 

 규.

 

 응?

 

 

 "거기에 있어?"

 

 

 정교하게 박제된 웃음이 남은 이의 눈에 들어온다.   

 

 백사장에 찍힌 발자국은 한 개뿐이고 여전히 이규는 그림자가 없다. 최종수는 쓸쓸하단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